[2025.03.02-주일축제예배] 주저하지 않으시는 예수님(누가복음 15-1-7)
페이지 정보

본문
개역개정
제 15 장
잃은 양을 찾은 목자 비유(마 18:12-14)
1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2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3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4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5 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6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
주요 주제
- 예수님의 사랑의 특징과 그 의미
- 예수님의 사랑이 지역과 민족을 초월한 이유
- 예수님의 사랑이 죄인들과 잃어버린 자들에게 미치는 영향
다음 할 일
-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이해와 묵상
- 잃어버린 양을 찾는 일에 동참
요약
하나님의 사랑
-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라는 말씀은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이신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을 구별하지 않고 차별하지 않고 사랑하신다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말씀하고 싶었던 것임
- 하나님의 사랑은 지역을 초월하고 나라와 민족을 뛰어넘는 사랑임
- 하나님은 우리의 형편에 따라서 골라서 사랑하는 분이 아님
예수님의 사랑
-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저와 여러분이 구원받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지금도 그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을 누리고 있다는 사실임
- 예수님의 사랑은 지역과 사람과 가치를 초월한 사랑이었음
- 예수님은 사랑이 필요한 곳이라면 누구를 막론하고 만나셨음
예수님의 사랑
- 예수님은 안식일에 수종병 든 자를 고쳐줌으로 바리새인들에게 율법을 어긴 자로 죄인이 되는 것을 알면서도 고쳐줌
- 예수님은 자신을 죽이기 위해 지켜보고 있는 수많은 바리새인들과 율법 교사들 앞에서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수종병 든 자를 고쳐줌
- 예수님은 자신을 죽일 증거를 차고 있다는 모든 계획을 아시면서도 그 식사 초대를 회피하지 않으셨고 참석하심
예수님의 사랑
-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기 위해 가는 길이 자신의 죽음을 맞이하는 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음
-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려주기 위해 가는 그 걸음은 죽음을 각오하고 가는 걸음이었음
- 예수님께서 그곳으로 갔던 이유는 나사로를 사랑했기 때문임
예수님의 사랑
- 예수님의 사랑을 가장 정확하게 보여주는 말씀이 오늘 본문의 말씀임
-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질문을 던진 이유는 너희와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임
예수님의 사랑의 특징
- 예수님이 죄인들과 어울리고 죄인들과 식사하며 그들을 사랑하는 이유는 잃어버린 자를 찾고 죄인들을 찾아 구원하게 왔다는 것을 그들에게 다시 한 번 분명하게 가르치기 위해서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었기 때문임
- 예수님의 사랑의 특징은 한 사람을 절대로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평가하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것임
- 예수님은 우리 안에 있는 99마리의 양과 동일하게 길을 잃고 방황하고 있는 그 양도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 99마리 양의 가치만큼 잃어버린 그 한 마리의 양에게도 가치를 부여하신 분임
예수님의 사랑
- 예수님은 방황하는 양을 찾을 때까지 수고를 멈추지 않았음
- 우리의 모습이 방황하는 불쌍한 어린 양이 아닐까 생각함
- 우리는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잃어버린 양을 찾아 하나님 앞에 세워 기쁨을 돌리는 일에 함께 수고하고 애써야 함
---------------------
예수님께서 유대인이요 또 바리새인이었던 니고데모와의 대화 속에서 하셨던 유명한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잘 아는 말씀이죠.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여러분 다 암송하시는 말씀이잖아요.
그렇죠. 이 말씀은 자신의 구원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니고데모에게 예수님께서 구원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 그리고 그 하나님은 모두를 조건 없이 사랑한다는 그 말씀을 주시는 겁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했다. 여기서 말하는 세상은 헬라어는 코스모스죠.
영어로는 더 월드 즉 세상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지역과 모든 민족과 모든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하고 싶었던 말은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이신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을 구별하지 않고 차별하지 않고 사랑하신다는 그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말씀하고 싶었던 겁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지역을 초월하고 나라와 민족을 뛰어넘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인종과 피부를 구별하지 않고 사랑하셨습니다.
아가페의 사랑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인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윗도 이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직접 경험한 사람입니다.
시편 여러 곳에서 이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그는 노래합니다.
시편 103편 8절에서 11절까지 말씀도 다윗이 경험했던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함께 고백해 볼까요? 시작. 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자주 경책하지 아니하시며 너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
우리의 죄를 따라 우리를 처벌하지는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우리에게 그대로 갚지는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의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하나님은 우리의 형편에 따라서 골라서 사랑하는 분이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는 끝없이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하고, 하나님 앞에는 큰 죄와 허물이 있음에도 하나님은 용서하시고 무조건적으로 우리를 사랑해 주신 거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보여주어야 할 사랑 늘 우리가 입술로 사랑, 사랑을 이야기하지만 그 사랑은 조건 없는 사랑이어야 하는 거죠.
용서할 수 있는 그 사랑, 우리가 무조건적으로 용서받았기에 우리도 용서할 수 있는 그 사랑이 필요한 거죠.
신학자인 칼 바르트는 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단 한 줄로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사랑할 대상을 찾아서 사랑하는 분이 아니라 사랑할 대상을 창조하여 사랑하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조건에 따라 그 조건에 맞는 사람을 골라서 구원하고 사랑하시는 분이 아니라 조건에 맞지 않는 사람까지도 하나님이 창조해서 사랑하시는 분이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거죠.
중요한 것은 이런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저와 여러분이 구원받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지금도 그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을 누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에게 이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사랑으로 자녀 됨에 그 은혜와 축복이 여러분에게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이 사랑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 이어졌습니다.
주님이 아버지의 그 사랑을 이어받으셨죠? 여러분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사랑은 지역과 그리고 사람과 가치를 초월한 사랑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랑이 필요한 곳이라면 누구를 막론하고 만나셨습니다.
그 당시 최고의 자리에 있던 바리새인들, 서기관들, 대제사장들 그들과도 만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랑이 필요하다면 죄인들과 부정하여 공동체로부터 격리되어 살아가던 세상에 버렸던 그 하찮은 사람들까지도 예수님은 찾아가셔서 만나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열리고 지방을 지나가시는 길에 예수님께서 그곳을 지나간다는 소문을 듣고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기 위해서 몰려왔습니다.
그 자리에 세리장 사케오도 그곳에 있었습니다. 사케오는 유대인들로부터 미움과 증오의 대상이기 때문에 그 무리들 속에 있을 수가 없어서 그는 나무 위에서 예수님을 보고 있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는 그 상황인데 예수님께서 갑자기 공개적으로 사케오를 지명하며 사케오야 속히 내려오라.
오늘 내가 너의 집에 유하겠다, 내가 너와 함께 먹겠다 말씀하셨습니다.
충격적인 선언이죠. 그 당시 사람들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그런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19장 7절에 보면 무 사람이 보고 수근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다라고 비난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세금을 거둬서 로마의 바치는 직업 때문에 유대인들로부터 증오의 대상이었고, 많은 사람들과의 관계가 깨어져 외롭게 살고 있던 사케오, 버림받은 사케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그 사케오의 집에 들어가셨고 그곳에서 그와 함께 음식을 나누며 하룻밤을 유하셨습니다.
그리고는 회개하는 사교의 회개를 보고 오늘 이 집의 구원이 임했다고 구원을 선언해 주셨습니다.
이 사건 때문에 예수님은 바리새인들로부터 수많은 비난을 받으셨습니다.
마가복음 2장 16절 말씀 같이 읽어볼까요? 시작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 및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시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여러분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의 중심 지역이 갈릴리였다는 것은 여러분 다 잘 알고 있을 겁니다.
부활하신 후 제자들과 만난 곳 역시 갈릴리 지역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 유독 갈릴리 지역을 사랑하셨고 그곳을 전도의 대상으로 삼으셨을까요?
예수님 당시 갈릴리 지방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함께 모여서 살고 있는 곳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도 사랑했지만 그 이방인들까지도 복음의 대상으로 생각했기 때문인 거죠.
그리고 그 갈릴리에는 예루살렘에서 실패하고 상처 입은 사람들이 그들의 도피처로 생각하고 와서 살고 있는 곳이 갈릴리 지역이었습니다.
그 갈릴리 지역은 예수님께서 이미 말씀하셨던 것처럼 인자가 온 것은 잃은 자를 찾아 구원하기 위해서 왔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오히려 죄인들을 위해 목숨을 내어 죽이러 왔다라고 하셨던 예수님의 그 가치와 맞아떨어진 곳이 갈릴리 지방이었던 거죠.
그래서 예수님은 갈릴리 지역에서 머물기를 좋아하셨고, 그곳 사람들 소외당한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었던 거죠.
예수님은 사랑이 필요한 것은 주저하지 않고 달려가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사랑이 필요한 사람이 있는 곳에는 눈치 보지 않고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심지어는 생명의 위협이 있는 걸 알면서도 예수님은 그곳을 향해 달려가셨습니다.
누가복음 14장 말씀에 보면 어느 안식일날 바리새인 중에 지도자급이었던 한 사람이 예수님을 자신의 집에 식사 초대를 했습니다.
누가복음 14장 1절 말씀입니다.
시작 안식일에 예수께서 한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 떡 잡수로 들어가시니 그들이 엿보고 있더라.
여러분 이 식사 초대는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나 존경 때문에 만들어진 자리가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을 모함하고 예수님을 죽일 근거를 찾기 위해서 의도를 가진 초대였습니다.
예수님을 초대한 이 바리새인 그는 분명 산에 들인 공의회 회원이었고, 그리고 바리새인들 중에도 지도자급이었습니다.
그가 단순히 예수님을 존경해서 초대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죽일 근거를 잡기 위해 증거를 잡기 위해 의도된 초대였습니다.
그 바리새인 지도자가 안식일날 예수님을 초대한 이유가 있습니다.
몇 주 전에 예수님께서 안식일 회당에서 18년 동안 귀신에 사로잡혀서 한 번도 허리를 펴보지 못했던 그 불쌍한 여인을 고쳐주었습니다.
귀신을 쫓아내고 그의 병을 고쳐주었습니다. 이것을 본 회당장이 예수님을 향하여 화를 내고 책망했습니다.
안식일에 이랬다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오히려 예수님은 그 회당장을 책망하며 안식일의 주인이 하나님이고, 나는 아버지가 일하기 때문에 나도 일한다고 책망했던 거죠.
회담장이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창피를 당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아마 이 사건에 대하여 들었던 그 바리새인의 지도자급이었던 이 사람이 예수님에게 설욕을 하기 위해서 그 자리를 의도적으로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세 가지의 내용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요.
그 바리새인 지도자가 예수님을 초대한 식사 자리에 율법 교사를 초대했습니다.
율법으로 말해보자는 거죠. 두 번째는요. 예수님을 초대한 식사 자리에 수종 병든 사람이 와 있었습니다.
그가 그 자리에 올 수가 없죠. 자의적으로 올 수가 없죠.
의도적으로 그를 초대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 날은 일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병든 자와는 가까이하면 부정하다고 해서 가까이하지 않습니다.
있어야 도저히 있지 않아야 할 있을 수 없는 자리에 이 수종 병든 자가 왔다는 것은 그들이 의도적으로 그를 데려온 거지, 세 번째는요.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셨을 때 다른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더라는 겁니다.
숨어서 주목하고 있는 겁니다. 이런 상황이겠죠.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서 덫을 놓고 예수님께서 그 덫에 걸려들기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이 식사 자리를 만들었던 겁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자신 앞에 있는 수정병으로 고생하는 사람을 모른 채 하고 고쳐주시지 않는다면 예수님은 사람을 차별하는 사람이 되는 거죠.
어떤 사람은 고쳐주고 어떤 사람은 고치지 않았다는 그런데 또 넘어가게 되는 거죠.
만약 예수님께서 그 병자를 고쳐주면 안식일에 일을 냈다고 안식일을 범함으로 바리새인들에게 율법을 어긴 자로 죄인이 되는 거죠.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은 자신을 죽이기 위해 지켜보고 있는 수많은 바리새인들과 율법 교사들 앞에서 조금 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수종병 든 자를 고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돌려보내 주셨습니다. 이 일로 인해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로부터 더 큰 생명의 위협 앞에 놓이게 됩니다.
마태복음 12장 14절에서 15절 말씀 시작,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거늘 예수께서 아시고 거기를 떠나가시니 마가복음 3장 6절 말씀입니다.
시작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헤롯 왕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니라 예수님은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자신을 죽일 증거를 차고 있다는 모든 계획을 아시면서도 그 식사 초대를 회피하지 않으셨고 참석하셨습니다.
안식일 그 죄인을 살려주면 율법을 어기는 걸 알면서도 예수님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그 병자를 고쳐 주셨습니다.
이유는 한 가지죠. 주님이 그를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사랑인 거죠.
예수님의 이런 사랑을 우리가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는 좋은 예가 요한복음에 또 나옵니다.
예수님은 공생의 사역 중에 지치고 피곤할 때 자주 방문했던 곳이 있습니다.
베단이라고 하는 곳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 예루살렘에 들어가셔서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어쫓고 성전을 정화시킨 다음 다시 예루살렘 성을 나오셔서 역시 베다니에 가셔서 주무시고 또 다음 성전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만큼 예수님은 베다니를 좋아했습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그곳에는 예수님이 사랑했던 친구 나사로가 있었고, 그 나사로의 너희들 마리아와 마르다가 예수님을 사랑했고, 예수님을 늘 공개했던 그 교재가 귀하고 좋아서 예수님은 늘 베다니를 즐겨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다른 곳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는데 그렇게 가깝게 지냈던 나사로가 병들어 죽어간다고 하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권면하여 우리가 다시 나사로에게로 가자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럴 때 제자들은 뜻밖의 반응을 합니다. 요한복음 11장 8절 말씀입니다.
시작 제자들이 말하되 랍비어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여러분 제자들이 예수님과 나사로의 그 관계를 모를 리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나사로를 고치기 위해서 가겠다고 그는 예수님을 제자들은 막아섰습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며칠 전에 예수님께서 그 유대의 성전 안 솔로몬 행각에 있을 때 수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 앞에 몰려왔습니다.
그동안 예수님이 하셨던 일, 그 모든 것들을 따지기 위한 거죠.
그곳에서도 예수님은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하나님과 내가 하나라고 말씀을 전합니다.
이 말씀 앞에 유대인들은 또다시 분노했습니다. 그들이 돌을 들어서 예수님을 치려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0장 33절 말씀입니다. 시작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로 말미암아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신성 모독으로 인함이니 너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다.
그들은 예수님이 누군가를 알지도 못했고, 예수님이 가르쳐 주어도 그들은 그 예수님의 말씀을 받을 생각이 조금도 없었습니다.
끝없이 의심했고 끝없이 부정했습니다. 이제 그들은 하나님과 자신이 하나라고 하는 이 말에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 돌을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손에서 벗어나 다른 곳으로 가셨다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금 제자들의 머릿속에는 며칠 전에 있었던 이 위급한 상황을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그곳으로 가신다면 그 유대인들이 달려들어서 예수님을 돌로 쳐 죽일 것 같은 그 엄청난 위협 위기감을 제자들은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사랑하는 예수님을 막아야 보호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막았습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죠.
왜 제자들이 자기가 가려고 하는 이 길을 저렇게까지 막는지 주님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주님의 기억 속에도 분노했던 그 유대인들, 그들이 돌을 들고 예수님을 향해 달려들었던 그 장면을 주님도 분명하게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만류하는 제자들의 입장도 주님은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향해 가시기로 결심했습니다.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다. 내가 가서 깨워주겠다.
내가 깨우러 가겠다. 예수님은 그 나사로를 살려주기 위해 가는 그 길이 어쩌면 자신의 죽음을 맞이하는 길이라는 것도 알고 계셨습니다.
위험천만하다는 것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그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예수님의 생각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던 제자들, 그들도 예수님을 따라가 나섭니다.
재미있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중에 도마라고 하는 사람이 다른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이 말에 그 당시의 분위기를 여러분 느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려주기 위해 가는 그 걸음은 죽음을 각오하고 가는 걸음이었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엄청난 위험을 무릅쓰고 그 길을 가는 겁니다.
제자들은 그 주님의 마음을 알았습니다. 제자들도 주님을 따라 그 길을 가는데, 그들도 자신의 죽음을 무릅쓰고 그 길을 가는 거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그곳으로 갔던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나사로를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기 위해 그를 살려주기 위해 예수님은 자신 앞에 어떤 어려움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그 길을 가셨던 거죠.
그리고는 나사로의 무덤을 향해 나사로야 일어나라 외쳤고, 그 나사로는 살아났습니다.
여러분 이 성경의 이 기사는 죽은 자를 살렸던 단순한 기사가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예수님의 사랑이 어떻게까지 있는가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참 소중한 메시지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잘 알고 있잖아요. 예수님은 끝까지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요한복음 13장 1절 말씀 우리 함께 고백합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 것이 바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십니다.
끝까지 사랑하시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조금도 주저하지 않으시는 주님의 사랑.
여러분 그 사랑을 우리가 경험했습니다. 그 주님의 사랑 때문에 허물 많던 우리가 구원받아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의 권세를 누리고 있음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런 예수님의 사랑을 가장 정확하게 보여주는 말씀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너무 잘 아는 71마리의 양을 찾아 그 험한 길을 마다 앉지 않고 찾아 나선 선한 목자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의 말씀을 하신 대상은 역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있는 곳에 수많은 무리들이 몰려왔습니다.
그들 속에는 자기들의 눈에는 죄 많은 죄인들도 거기에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그 죄인들과 함께 대화하는 것을 보면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수근거렸습니다.
누가복음 15장 1절과 2절, 오늘 본문 1절 2절 말씀입니다.
시작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근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여러분 이 사건은 이미 한두 번이 아니죠. 예수님은 수없이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수근수근거리는 죄인과 함께한다는 그 얘기를 수없이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오늘도 여전히 죄인들과 함께 있습니다.
그런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예수님이 질문을 던집니다.
너희 중에 양 100마리가 있다면, 그런데 그중에 한 마리가 길을 잃고 방황하고 있다면, 우리 안에 있는 99마리의 양을 두고 가서 그 한 마리 양을 찾지 않겠느냐 그리고 그를 찾아서 어깨에 메고 와서 잃어버린 내 양을 찾았다고 이웃들과 함께 잔치를 벌이지 않겠느냐 질문을 던진 거죠.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던진 질문입니다. 예수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그들은 절대로 그렇게 할 사람이 아닌 거죠.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자신들의 의에 사로잡혀서 나는 깨끗하고 나는 괜찮은데, 그 죄인을 위해서 수고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예수님은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어떻게 하겠느냐고 질문을 던졌을까요?
나는 너희와 다르다는 겁니다.
너희가 이해하지 못하는 죄인들과 어울리고 죄인들과 식사하며 그들을 내가 사랑하는 이유는 나는 너희와 달리 내가 이 땅에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고 죄인들을 찾아 구원하게 왔다는 것을 그들에게 다시 한 번 분명하게 가르치기 위해서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었던 겁니다.
여러분 이 비유의 말씀 속에 예수님의 사랑이 세상 그 어떤 것과 다르다는 예수님의 사랑의 특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은 한 사람을 절대로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평가하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99마리의 양, 그것과 동일하게 길을 잃고 방황하고 있는 그 양도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 99마리 양의 가치만큼 잃어버린 그 한 마리의 양에게도 가치를 부여하신 분이 주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동일한 가치를 부여하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은 99마리의 양을 두고 그 한 마리 잃은 양을 위해서 찾아 나서는 수고를 기꺼이 감당했던 거죠.
세상은 그렇지 않잖아요. 여러분 사람들은 그렇지 않잖아요.
숫자가 많다고 거기에 힘을 부여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99마리 양이 남아 있는데 그걸로 만족할 것입니다.
굳이 한 마리 정도는 없어도 잘 되었다고 말 안 듣더니 고생해 보라고 그렇게 버리지 않겠습니까?
사람들은 우리 안에 있는 99마리의 양은, 이 양은 원래 내 말을 잘 듣고 착하고 지혜로운 양이라고 그렇게 높이 평가하고, 길을 잃어버리고 방황하는 한 마리의 양은 그는 원래 못되었다.
그는 원래 성격이 괴팍하다 잘 됐다 그렇게 평가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그렇게 평가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9마리의 양도 길을 잃고 방황하는 한 마리의 양도 똑같이 똑같이 사랑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저와 여러분을 동등하게 차별하지 않고 똑같이 사랑해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잘 났다고 많이 가졌다고, 많이 배웠다고, 많은 힘을 가지고 있다고, 젊다고 건강하다고 그를 더럽히지 않습니다.
그도 사랑하지만 주님은 이 세상으로부터 소외당한 자, 홀로 눈물 흘리는 아무것도 자랑할 것 없고 아무것도 내어놓을 수 없는 그도 주님은 똑같이 사랑하십니다.
그 잘난 사람을 위해 주님은 십자가에서 못 박혔지만, 부족한 사람, 못난 죄인들을 위해서도 주님은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오늘 우리의 소망, 우리의 희망은 여기에 있습니다.
세상의 가치관으로 본다면 우리는 점점점점 그들로부터 밀려나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은 오늘도 변함없어서 우리를 세상에 어떤 것과 비교하지 않고 우리 자체, 우리의 인격 자체를 사랑하시는 주님 때문에 오늘도 우리는 주님 앞에서 소망 가운데 살아가게 될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의 생각은 길을 잃고 방황하는 그 어린 양, 그에게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 어린 양을 찾을 때까지 예수님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수고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어린 양의 처지를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인 거죠.
양은 상대의 다른 짐승의 공격으로부터 자기를 보호할 수 있는 아무런 능력도 없습니다.
양은 시력이 약했기 때문에 자기가 가는 길에 저 멀리를 보지 못합니다.
그것이 낭떠러지인지 아니면 맹수가 지키고 있는지 전혀 보지 못한 채 양은 이길 저길 방황하는 거죠.
목자는 그 양을 잘 알잖아요.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자신의 품을 떠나서 방황하고 있는 그 어린 양을 너무 잘 알고 계시죠 그 앞에 다가올 엄청난 위기를 예수님은 알고 계시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99마리의 양을 바라보면서 안도하거나 편히 쉴 수 없었던 겁니다.
방황하는 그 양을 찾을 때까지 예수님은 쉬지 않고 쉬지 않고 찾아간 거지요.
주님 앞에 우리의 모습이 우리를 박차고 이곳저곳 방황하는 그런 불쌍한 어린 양이 아닐까요?
어쩌면 여러분 중에는 그 예수 그리스도의 큰 사랑이 있었음에도 지금 그 우리를 떠나 공동체를 떠나서 방황하고 있는 그런 불쌍한 영혼이 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포기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여러분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반드시 여러분의 그 아픈 마음을 아시고, 여러분이 왜 방황하고 있는지를 아시고, 주님은 잃어버렸던 한 마리의 양을 찾아 어깨에 메고 오는 것처럼, 여러분들을 다시 공동체 안에 하나님의 은혜 안에 십자가 앞에 여러분을 세워 잃어버렸던 기쁨을 회복시켜 주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우리와 동일한 가치관을 가지고 사랑하셨던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우리 지난날 함께 신앙생활하던 우리 공동체 안에 있던 우리 형제 자매들 여러 가지 일로 인해 시험 들고 방황하고 있는 길을 잃고 방황하는 잃어버린 그 한 마리의 양을 위해 주님의 그 사랑하는 마음을 오늘 우리가 품고, 우리도 그들을 향해 다가가 손 내밀고 그들을 권면하고 그들을 설득하여 그들을 우리의 어깨에 메고 하나님 앞에 와 하나님께 기쁨을 돌리는 이 일에 우리도 함께 수고하고 애써야 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잘 아시는 그 가요 중에 무조건이라고 하는 노래 아시죠?
제가 이 말씀을 하면서 계속해서 제 마음속에 그 가사가 떠오르더라고요.
한 번 부르고 싶은데 그럴 수는 없고, 여러분 그 무조건 가사가 끝부분이 어떻게 되죠?
무조건 무조건이야. 당신이 나를 부르신다면 무조건 달려갈 거야.
당신을 향한 나의 사랑은 특급 사랑이야. 여러분 이 가사가 얼마나 기가 막힙니까?
나는 이게 우리 복음 속으로 들어와야 되는 거죠. CCC에 들어오면 너무 맞는 말이야.
얼마나 소중한 말씀이에요. 예수님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이 여러분 그 가사 구절절이 있잖아요.
태평양을 건너 대서양을 건너 인도양을 건너서라도 당신이 나를 부르신다면 달려가겠다는 이것이 주님의 마음 아닐까요?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에 아픔이 있다고 방황하고 있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주님이 여러분의 마음을 다 알고 계십니다. 주님은 여러분을 버리지 않으실 겁니다.
찾아가셔서 반드시 회복시켜 주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 대흥교회가 잃어버렸던 이 양을 주님의 마음으로 찾아가서 다시 하나님 앞에 세워드리는 이 거룩한 일에 한마음으로 헌신하시는 주님의 사랑으로 우리가 가야 할 이 길을 끝까지 달려가는 저와 여러분 우리 대원교회 공동체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사랑을 위해 주저하지 않으시고 망설이지 않으시고 달려오시고 찾아주셨던 예수님의 그 큰 사랑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예배의 자리에 있음을 깨닫습니다.
때로는 낙심하고 여러 가지 이유로 방황하고 있지만 주님은 변함없이 사랑하시고 찾아오셔서 어루만져주시고 다시금 은혜의 자리에 회복시켜 주실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대운교회 모든 성도들, 우리가 이 사랑을 받았으니 이제 이 사랑을 회복하고 공동체에서 떠나 방황하고 있는 잃어버린 우리의 양들을 주님의 마음으로 찾아가 권면하고 위로하여 이 성전에 하나님 앞에 세우는 거룩한 일에 우리가 마음을 모으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2025.03.02-주일축제예배] 주저하지 않으시는 예수님누가복음 15-1-7.mp3 (45.6M)
1회 다운로드 | DATE : 2025-03-12 13:54:32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